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뇌성 전투 (문단 편집) == 발단 == [[원주시|북원]]에서 거병한 [[양길]]은 후삼국 시대 초기에 일어난 호족 중 상당한 세력을 쌓았다. 그 과정에서 [[기훤]]에게서 벗어난 [[궁예]]를 받아들이는데 '''이것이 모든 재앙의 시작이었다.''' 궁예는 동진하여 명주를 접수하고 서진하여 철원과 패서 지역까지 땅을 넓히고 왕을 칭하기에 이르렀다.[* 이것은 [[신라]]에게 반기를 들고 독립 세력을 형성했다는 것을 의미하며, 진정한 의미에서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왕 칭호를 사용한 것은 901년이다. 견훤도 처음 왕을 칭하고나서 몇년 후에야 비로소 후백제를 건국했는데 견훤은 궁예보다 훨씬 빠른 892년에 이미 왕을 칭했으며 900년에 후백제를 세웠다.] 실제로 홀대했는지는 몰라도(딸을 준 것은 드라마에서의 창작.) 궁예의 원래 병력이 600명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애매하다. 나중에는 5,000명을 넘어서 만 단위까지 등장하지만 각종 호족들이 활개치던 초기에 이게 많은 병력인지 적은지 판단하기 힘들기 때문. 다만 고려 후기 한 지방을 석권한 원수들의 사병이 500수준에, 고려 중앙정부를 먹어치운 최씨정권은 3000, 동북 정규군 세력에 여진족 병력까지 빨아먹은 [[이성계]]의 가별초가 3000이었음을 고려하면 일개 지방 군벌 입장에서 500-600은 절대 적은 숫자는 아니다. 아무튼 궁예가 커지자 양길은 주변 호족들을 규합하여 비뇌성에서 궁예와 전면전을 벌이는데…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